수용소 증언

사랑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3년 – 김수철

김수철 (요덕수용소, 1992~1995 수감)

한국방송을 듣던 진짜 반동분자

나는 국경수비대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던 중 체포되어 요덕에 수감되었다. 나는 5454부대 소속이었는데, 5454부대 5454부대는 대규모 부대였지만 김정일의 지시로 하루아침에 해산됐다. 5454부대의 정치부장 아들이 한국방송을 들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치부장은 김정일에게 매일 전화로 보고까지 하는 고위 간부였는데, 그런 그의 아들이 한국방송을 들었다는 사실을 김정일이 알고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 큰 부대를 해산시켜 버렸다고 한다.

 
는 해안국경 수비부터 수용소 관리까지 맡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대규모 부대였다. 복무 당시 나는 대대장 운전수를 했는데, 대대장보다 대대정치지도원의 권력이 더 셌기 때문에, 대대장 차를 거의 대대정치지도원이 타고 다녔다. 즉, 나는 사실상 대대정치지도원의 운전수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 대대의 정치지도원은 북한 외부에 관심이 많고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한국 방송이나 중국 영상을 보는 데 거부감이 없었고 심지어 탈북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 하지만 간부이다 보니 거동이 조심스러웠기에, 탈북을 돕는 임무는 수하인 내 몫이었다.

 
나는 1991년도 8월에 잡혔다. 북한주민들의 탈북을 돕는 일을 2~3년 정도 지속하던 중이었다. 1992년이 김일성 탄생 80돌이었던 까닭에 91년도부터 간부들 간의 충성 경쟁이 대단했고 부대 안에서도 단속이 강화되었다. 우리 부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한 실적 경쟁 과정 속에서, 대대장과 참모장이 대대 정치지도원의 약점을 잡기 위해 지속적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런 와중에 대대 정치지도원과 내가 주민들의 탈북을 도운 것이 발각되었다. 우리가 탈북을 도왔던 한 여자가 중국에서 잡혔는데, 심문 과정에서 우리의 개입 사실을 자백한 것이다. 보위부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몰래 내 차에 도청장치를 달았다. 당시 우리는 차 안에서 한국 방송을 듣곤 했었는데 그게 도청장치에 딱 걸리고 말았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방송을 듣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고 매우 중대한 죄로 취급되었다.

 
체포된 대대정치지도원은 완전통제구역으로 보내졌다. 나와 탈북에 관여했던 또 다른 한 명은 혁명화구역 수감 대상이 되었는데 수감된 건 나뿐이었다. 그 녀석의 아버지가 고위간부인 서해담당 수산위원회 간부였기 때문에 그 친구는 보위부 구류장까지 갔다가 석방되었고, 아무런 연줄이 없는 나는 꼼짝없이 수용소로 끌려가게 됐다. 대대정치지도원은 중앙당에 지인이 있었지만 죄가 너무 중했던 탓에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나중에 요덕에서 석방된 이후, 대대정치지도원의 행방을 수소문 해 보았지만 대대정치지도원도, 그의 가족도 찾을 수가 없었다.

 

 

체포부터 요덕으로 가기까지

 

1991년도 8월 1일. 내가 체포된 날의 기억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보위부장이 찾는다는 소리에 나는 대대정치지도원과 함께 5454부대 본부에 있는 우리 부대 담당 보위부로 갔다. 대대 정치지도원이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 나를 불렀다. 방으로 들어가자 보위부원들이 다짜고짜 족쇄를 채웠다. 그들은 ‘잘 반성 좀 해 보라.’는 말과 함께 나를 사동구역 안전부에 감금시켰다. 우리부대에는 구류장이 없었기 때문에 안전부에 구금시킨 것이다. 약 20일 정도를 그곳에서 머물다가, 평성에 있는 도 보위부 구류장으로 이송되었다.

 
내가 수감되었던 구류장은 초대소와는 다른 곳이다. 초대소나 구류장이나 죄를 심문하는 것은 같지만, 초대소에선 수감자에게 죄목을 글로 쓰라고 시키는 반면에 구류장에선 말로 실토하도록 하고 예심원이 수감자의 말을 기록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어느 방식이든 심문과정이 괴롭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요덕에서 만난 희태라는 친구에게서 초대소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글을 쓰게 만들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도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위의 고하에 따라 지위가 높은 사람은 초대소로 보낸다. 초대소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도 벽에 걸려있고 침대나 책상과 같은 기본 가구도 갖춰져 있다. 반면 구류장엔 가구라곤 없이 차가운 맨 바닥뿐이다.
초대소든 구류장이든 일주일 정도 심문하면 죄를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것은 다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감기간이 보통 8개월이나 걸리는 이유는 심문기간 때문이 아닌, 수감자의 배경을 조사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나도 구류장에 8달을 있으면서 예심원은 채 8번도 만나지 않았다.

 

요덕으로 가는 길

 

나는 92년 3월 25일 혁명화구역에 들어갔다. 구류장 경비는 나에게 ‘좋은 곳’에 간다고 말했다. 일단 승용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내가 속했던 5454부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류장 경비가 한 말도 있고 해서, 나는 다시 부대에 복귀하는 줄로만 알았다. 부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니, 비닐 포장에다가 돼지고기와 밥을 잔뜩 싸주는데, 그때서야 난 내가 풀려나는 게 아니라 어디론가 호송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부대에서는 도시락뿐 아니라 새 배낭과 새 군복 두 벌, 새 신발, 겨울내의, 면내의, 속옷, 비누, 양말까지 챙겨줬다. 수용소에 들어오는 대부분이 아무런 채비 없이 거의 맨몸으로 들어온다는 걸 안 이후에, 부대에서 나를 많이 신경 써줬구나 싶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5454부대를 떠나 평양 서성구역의 국가보위부 총사 근처에서 화물칸에 지붕을 덮은 트럭으로 옮겨 탔다. 트럭 안엔 7명의 죄수가 있었는데, 죄수들을 한 번에 호송하기 위해 날짜를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트럭 화물칸에는 의자가 가로로 길게 마주보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난로자리처럼 보이는 자국이 있었는데 난로는 없었다. 의자 뒤엔 족쇄를 묶을 수 있는 봉이 있었지만 우리는 족쇄를 차진 않았다. 호송 도중 점심시간이 되자, 어느 냇가에 내려서 밥을 먹었다. 족쇄를 차지 않은 채로 자유롭게 식사를 했는데, 굶주리고 나약한 상태의 수감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밥을 먹기 시작하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보다 못한 보위부원들이 사태를 진정시킨 후에야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살펴보니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구류장에 오랫동안 있었던 사람들이라 몸이 약해 뛸 힘이 없기도 했지만, 우리가 밥 먹는 곳이, 한 쪽은 절벽이고 반대쪽은 가시넝쿨이 얽혀있는 곳이라 탈출 자체가 불가능한 그런 지형이었다. 식사 장소를 애초부터 정해놓은 듯 했다.

 
나는 트럭 창문을 통해 이정표를 보고 나서야 요덕에 간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북창으로 호송되는 줄 알았다. 북창엔 탄광이 있기 때문에 탄광에서 일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차가 양덕고개를 넘어 요덕읍을 지나는 것을 보고 요덕수용소로 가는 것을 눈치 챘다. 5454부대가 요덕 수용소 경비도 맡았기 때문에 나는 요덕에 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덕에서도 산길을 따라 몇 시간을 달린 후에야 요덕수용소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문에 도착하니 경비병이 트럭에 타고 있는 수감자 수를 확인하였고 내부지도원 양수철이 트럭에 올라탔다. 그 이후 80리 정도를 더 올라가서 혁명화구역인 대숙리에 도착했다.
우리는 저녁 5시쯤 외래자반에 들어갔다. 그때 우리가 앞으로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는데, 나중에 한국에서 다른 수용소 출신 생존자들에게 들으니 수감생활을 몇 년 한다고 알려주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 땐 맥이 탁 풀려서,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저녁밥이 뭐가 나올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요덕에서의 나의 생활

 
나는 약 20일 정도를 외래자반에서 보내고 4월 13일에 농산반에 배치되었다. 당시 농산반 담당보위지도원은 김형섭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농산반에 배치된 지 2~3일 후 그는 나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모임에 살짝 늦었는데 나를 보고 아버지가 김책공대 졸업하고 자기 자신은 국경수비대원까지 했는데도 국가를 배신했다면서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망신을 주었다. 요덕수용소를 관리하는 5454부대 출신이다 보니 나를 더 미워했던 것이었다. 후에 우리 부대에서 들어왔던 다른 수감자들도 똑같이 미움을 당했다.

 
당시 나는 최군한이라는 사람이 분조장을 맡고 있던 분조에 소속되어 2달 동안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다가 옥수수를 심기 시작할 무렵, 담당 보위부원인 형섭이가 농사 좀 잘 지어보자면서 3작업반을 군대처럼 개편 해버렸다. 그때 3작업반은 2개 소대로 개편이 되었는데, 내가 있던 1소대의 소대장으로 수용소경비를 하던 김철웅이 오게 되었다. 나는 김철웅과 딱 붙어 다니던 사이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수용소 내 구류장에 갔다 온 1994년 1월까지, 2년 동안 비교적 편하게 수용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군인출신이어서 그랬는지, 김철웅과 나는 말이 통했다. 수용소는 보위부원들이 재량대로 관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수감자라도 소대장 정도가 되면 꽤 권력을 가진다. 물론 직책이 없는 수감자에겐 허용되지 않는 자유들이다. 소대장이 되면 해당 소대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김철웅은 나에게 자신의 별식을 마련하는 일을 맡겼다. 소대장이 하라고 하면 소대원들은 아무리 억울해도 불만을 토로하지 못한다. 물론 간혹 담당 보위부원에게 고해바치는 녀석들이 있긴 했지만, 소대장이 보위원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보위부원도 눈 감고 넘어가 준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이번에는 담당 보위부원인 김형섭의 특별지시를 받고 식당 화목공을 하게 되었다. 땔감을 책임지는 화목공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무를 하러 다니기 때문에 수용소 내를 비교적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식당 화목공은 식당에서 밥을 더 얻어먹을 수도 있다. 김형섭이 나를 화목공에 배치한 이유는, 미화라는 여자네 집 장작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미화는 재일교포였는데 가족이 함께 수용소에 들어와 있었다.

 
수용소 내엔 10년 이상 수감생활을 한 재일교포들이 있었다. 70년대 재일교포들의 대규모 이주가 있은 뒤, 많은 재일교포들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오랫동안 석방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었다. 미화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미화는 수용소 내에서 남자관계가 복잡하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담당 보위부원, 내부지도원, 소대장 등과 사귀면서 도움을 받아 살아갔는데, 당시에는 미화가 김형섭과 만나고 있었다.

 

김형섭이 나를 미워하긴 했지만, 미화가 나를 좋게 생각해주었던 탓에 수월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93년 가을에 몰래 트랙터를 몰다가 사고가 나서 트랙터는 망가지고 나는 크게 다친 적이 있다. 담당이 아닌 사람이 트랙터를 운전한 것도 구류장 감인데, 사고까지 냈으니 구류장에 10번을 가고도 남는 큰 죄였다. 그때 내가 구류장에 가지 않게 막아준 것도 미화였다. 미화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었고, 장작뿐 아니라 이것저것 많은 것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미화 입장에서는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1994년 1월, 김형섭과 미화의 관계를 고발하는 투서사건이 생기면서, 나는 트랙터를 망가뜨린 사건을 빌미로 구류장에 수감되게 되었다. 그리고 95년 해제될 때까지 농산반에 배치되어, 남은 1년은 여느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중노동에 시달리며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철웅과 형섭, 그리고 미화
미화의 남자관계가 복잡한 건 사실 생계 때문이었다. 수용소에서는 소대장이나 보위부원과 친해지면 장작 등의 물건을 구하거나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에 미화는 나이 많은 어머니와 정신이 온전치 못해 사람 구실을 못하는 오빠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생활을 꾸려 가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남자관계는 미화 나름대로 수용소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방법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김형섭은 미화의 남자 중 하나였다. 그는 월요일마다 보위부원에게 배급되는 쌀, 기름, 담배 등을 자신의 방에 갖다 놓으라고 지시하곤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물건들이 미화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보위부원과 여자수감자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수용소 내에서는 공공연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김형섭과 미화는 다른 수감자들이 퇴근한 이후에 미화의 집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나는 화목공으로 미화네를 자주 들렀기 때문에 김형섭이 드나드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였다. 그는 미화 집에 30-40분 정도 머물다가 나오곤 했는데, 미화 어머니는 둘이 집에서 은밀한 관계를 맺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보위지도원이 수감자, 그것도 여성수감자의 집에서 30분씩 머문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무조건 처벌감이었다. 그러나 미화네가 워낙 수용소 구석에 있는데다 모두들 쉬쉬하다 보니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소대장이었던 김철웅 역시 미화의 남자였다. 둘의 관계가 한창 좋을 때는 김철웅의 부탁으로 미화네에 장작을 보내거나 옥수수를 보내는 일을 내가 맡아서 하곤 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미화와 연인관계였던 김철웅이 다른 수감자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미화는 둘의 관계를 질투하기 시작했고, 미화의 어머니인 춘희도 둘이 만나는 것을 볼 때마다 소란을 피웠다. 이에 화가 난 김철웅이 미화와 형섭이의 관계를 고발하는 익명의 투서를 분주소에 넘겼다. 원칙대로라면 분주소에서 조사를 해야 하지만, 수용소 내에서 수감자와 보위부원이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분주소장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조용히 덮고 넘어갔다. 그리고 투서를 쓴 장본인을 찾기 시작했다.

 

투서사건, 그리고 구류장

 
내가 구류장에 간 건 철웅이의 투서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얽히고설킨 남녀관계의 희생물이 되어 내가 구류장에 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익명으로 투서를 넘긴 것이었기 때문에 투서 작성자가 김철웅이라는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는 상황이었다. 김철웅을 잡을 명분은 없었지만, 나는 철웅이의 절친이었을 뿐 아니라 트랙터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구류장에 넘길 명분이 있었다. 그래서 김형섭은 나를 물고 늘어졌다.

 
이전부터 김형섭은 가장 추울 때 나를 구류장에 넘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내가 구류장에 들어갔을 때가 한창 추운 1월이었으니, 형섭이는 자신의 공약을 지킨 셈이 되었다. 어쩌면 김형섭은 나를 죽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람 목숨이 우스운 그곳에서는 죽이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죄수 하나 정도는 쉽게 죽일 수도 있었다. 구류장으로 가던 날, 다행히 김철웅이 미리 귀띔을 해줘서 나는 구류장에 갈 채비를 단단히 했다. 겨울내의와 겉옷을 몇 겹씩 껴입어서 걷기도 힘들어 하는 내 모습을 본 김형섭은 부아가 치밀었는지, 요덕수용소 정문에 위치한 구류장까지 80리를 따라 내려와 내 옷을 벗기려고 들었다.

 
수용소 내 구류장은 수용소 정문에 위치해 있다. 구류장 건물은 기역자로 되어 있는데, 한 쪽은 혁명화구역용이고 다른 한 쪽은 완전통제구역용이다. 구류장엔 겨울인데도 벼룩이 엄청나게 많았다. 구류장에 보내진다는 소리를 듣고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매를 맞는 것이었다. 엎드리게 하고 매를 많이 때린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문과는 달리 내가 수감됐을 땐 폭력을 쓰진 않았다. 다만 추위를 그대로 견뎌야 했다. 산골의 혹독한 겨울추위에도 불구하고 난 입고 간 옷들 때문에 오히려 더워서 구류장에서 잠이 들어버렸는데, 그걸 본 구류장 보위부원이 내 옷을 벗기고 창문을 열었다. 나는 버선만이라도 신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그들은 버선마저 빼앗아갔다. 그렇게 거의 맨몸인 상태로 창문이 열린 구류장에서 열흘을 지냈다. 모포 두 장을 주긴 했지만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하루는 구류장 보위부원이 나에게 밖에 나가서 운동을 하고 오라면서 잠시 내보내 주었다. 이런 경우가 없기 때문에 영 수상쩍다 생각했다. 감방에 돌아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천장에 도청장치가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도청장치를 설치한 저녁, 김형섭이 구류장에 내려와 투서를 한 사람이 누군지 말하라고 했다. 나는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러자, 김철웅을 내가 갇힌 감방에 수감할 테니 김철웅의 자백을 받아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말을 하고 김형섭을 돌려보냈다.

 
김철웅이 감방에 들어온 날, 나는 그에게 바로 도청장치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을 것 같아 동작으로 알려주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화장실 벽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글을 써서 알렸다. 김철웅과 글을 통해 작전을 짠 이후에 말을 시키기 시작했다. “아, 근데 그 투서는 도대체 누가 쓴 거냐? 도대체 누가 썼을까?” “나야 모르지. 나도 알고 싶다, 도대체 어떤 간 큰 놈이 쓴 건지.” 우리는 시치미를 뚝 떼고 진심인 것처럼 연기를 했다. 일부러 크게 말을 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소리도 하면서 그 순간을 모면했다. 결국 김형섭은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고, 더 화가 난 그는 나를 한 달 이상 구류장에 방치했다. 원래 수용소의 구류장에는 최대 한 달 동안 가둬놓기 때문에, 한 달이 지나도 나가지 못하게 되자 ‘진짜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40일 만에 구류장에서 나와 대숙리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내가 돌아가자 다들 내가 죽었거나 완전통제구역에 간 줄 알았다고 말했다.

 

고달팠던 남은 1년의 수감기간

 
구류장에서 나온 이후로 난 해제되기까지 힘든 1년을 보내야 했다. 구류장에 갔다가 돌아온 수감자에게 기운회복을 위해 보위부원이 기름을 조금이라도 주는 것이 관례인데, 김형섭은 내가 정말로 괘씸했던지 기름 한 방울도 주지 않았다.
구류장에서 돌아온 이후에 김형섭은 나를 더욱 못살게 굴었다. 김철웅과도 다른 반에 배치가 되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이 보살핌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2년 동안의 편안했던 수용소 생활은 막을 내렸고, 농산반에서 힘든 노동을 하다가 1995년 2월 해제되었다.

 

요덕정치범수용소의 일상

 
요덕에서는 아침 5시 반쯤 기상하여 아침을 먹고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저녁 7시까지 일하고 나면 숙소에 들어간다. 당시에는 10시에 인원점검을 하고 취침을 했다. 총화를 하긴 했지만, 매일 한 것은 아니다.

 
독신자 숙소는 한 건물에 50~60명이 살았는데, 2~3평의 조그만 방에서 4명씩 지냈다. 한심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숙소였지만, 그래도 내가 있던 건물은 90년도에 지어진 새로운 숙소라 나름 새 거라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가족세대들은 숙소가 따로 주어졌다. 수용소에는 소규모 수력 발전소가 있어서 대숙리 지역에 공급되는 전기는 거기에서 생산되었다. 겨우 불을 켤 수준이긴 했지만 정전이 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요덕의 주식은 통강냉이밥이다. 쌀은 전혀 들어가지 않고 순옥수수로 만드는데, 질감이 퍽퍽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운 거친 밥이라서 한국에선 개나 고양이에게 줘도 쳐다도 안 볼 것 같은 형편없는 밥이다. 하지만 수감자들로선 다른 선택이 없다. 가끔 기름이 조금 나올 뿐이고 고기는 전혀 공급되지 않아서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가 매우 어렵다. 강냉이밥만 먹다 보면 온 몸에 껍질이 일어나고 입천장이 헐어버린다. 그래서 쥐나 개구리, 뱀을 몰래 잡아먹었다. 함께 나눠먹기도 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혼자서 몰래 먹는 경우도 많았다.

 

수용소에서는 대부분이 영양실조로 죽었다. 내가 속한 3작업반에서만 20명이 넘게 죽었다. 3작업반의 인원이 60명이었으니, 1/3을 넘는 인원이 죽은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통강냉이밥에 빨리 익숙해질 가능성이 높지만, 나이 든 사람들, 특히 수감되기 전 강냉이밥을 접해보지 않았던 높은 간부들은 식사를 전혀 소화시키지 못해서 몇 달 만에 죽고 만다. 한 번은 함흥 출신의 70 넘은 박사가 들어왔는데 세 달 정도 버티다 그대로 죽고 말았다. 공개처형으로 죽은 사람은 2명이 있었다.

 
내가 수감됐을 때 요덕 혁명화구역에는 300여명이 수감돼 있었다. 혁명화구역 인원은 계속 줄었는데, 이전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나가거나 가족세대 기준에서 독신자 기준으로 바뀌면서 줄었다. 처음 혁명화구역이 생겼을 때는 가족세대 위주였지만, 가족세대에서 비행이 많이 발생하자 수감대상이 독신자 위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전에는 가족세대끼리 표창결혼을 하기도 했다는데, 결혼으로 인해 해제가 되지 못하는 사태가 종종 생기면서 결혼을 하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족 세대는 독신자와 달리 수감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가족세대는 독신자보다 훨씬 오랜 기간 수용소생활을 한다. 하지만 생활은 독신자보다 편하다. 노동량은 같지만, 모여서 식량을 찾기가 아무래도 쉽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독신자는 정서적으로 자신이 정치범이라는 압박감을 혼자서 견뎌야 한다. 수용소에서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에 폭력이 발생하고 다치거나 죽어도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친 사람을 보살펴주는 것도 아니다. 수용소 외부에 알려지지도 않고 면회나 편지도 금지돼서 그런지 사람들은 늘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가족이 있으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기에 수용소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일 수 있는 것이다. 독신자들은 일과를 마치고도 집단생활을 해야 하지만 가족세대는 일을 마치면 가족들끼리 보낼 수 있었다. 식량도 가족은 보름에 한 번 꼴로 배급을 받았기 때문에 식량조절이나 저장이 가능했다. 하지만 독신자는 매일 급식체제이기 때문에 그런 건 불가능했다.
당시에 혁명화구역에 수감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말실수로 들어왔었다. 김일성을 욕하거나 체제 비판하는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죄가 되는 것이다. 북한에서 체제비판발언은 무거운 죄목이다. 그 이외에 중국에 가서 선교사나 남한 사람을 만나거나 남한 라디오방송을 듣거나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죄목도 있었다. 혁명화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원래라면 완전통제구역에 가야 하는데 김일성의 배려로 혁명화구역에 왔다면서 감사해 했다. 웃긴 것은 그 사람들이 혁명화에 오게 된 진짜 이유이다. 출신성분이 중요한 북한사회에서 완전통제구역으로 한 사람을 보내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성분이 좋은 사람은 대체로 혁명화에 보내는 것이다. 지주집안 같이 출신성분이 좋지 않으면 완전통제구역으로 보내는 게 더 쉬웠다. 그런 것도 모르고 김일성의 배려라고 감지덕지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최고가 되어 장군님을 철저히 옹호보위하자
나의 절친이었던 김철웅이 요덕에 수감된 이유는 친구들과 조직을 결성했기 때문이다. 철웅이는 김재만,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수감이 되었다.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도 삼총사로 불리곤 했다.
삼총사는 한창 혈기 왕성하던 십대 때 수감되었다. 이들은 군대와 과학, 사회에서 최고가 되어 장군님을 철저히 옹호하자는 결사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반동으로 걸려 잡혀 들어왔다. 북한에서는 사조직체 결성이 철저히 금지되지만, 그래도 진짜 반역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에서 만든 조직체였음에도 반동으로 걸린 것이다. 참 웃기는 나라다.

 

수용소에 가는 것보다 당증 뺏긴 것이 더 억울하오
나와 함께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이순철이라는 군인이 있었다. 수용소에 들어오는 중에도 계속 서럽게 울기만 했던 녀석이다. 밥 먹을 때 빼고는 진짜 계속 울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얼마나 황당한 녀석인가 하면, 애써 들어간 노동당에서 제명당한 것이 속상하고 서러워서 운다는 것이었다. 이 녀석은 기밀누설로 잡혀 들어왔다고 했다. 군에 방문한 소련군관이 기상시간이 언제냐고 물어 보기에 몇 시에 일어난다고 답한 것이 기밀누설로 되어 잡혀 들어온 것이다. 말 몇 마디에 억울하게 걸린 것이었다.

 
북한에서 출세를 하려면 간부가 돼야 한다. 간부가 되기 위해선 노동장 입당이 필수인데, 정상적으로 군복무를 마친 군인은 입당 후 대학을 졸업해서 간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였다. 군대 복무를 마치고 나서 입당하지 못하면 어딘가 결점을 가진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렇게 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가 어렵고 출세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북한에서 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순철이 속상해 한 것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억울하게 잡힌 것보다도 당증을 뺏겨서 울다니 참 우스운 노릇이었다. 북한에서 노동당원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죽음도 웃음거리가 되는 곳

 
요덕에서는 죽음이 익숙했다. 영양실조 등 각종 병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게 흔한 일이어서, 죽음에 무감각해진다.

 
한번은 함경남도 도안전부 참모장으로 있던 사람이 요덕에 들어와서는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때는 겨울이었고 아직 땅이 꽁꽁 얼어있었다. 공동묘지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가팔랐는데, 땅이 얼어서 관을 들고 올라가기가 더욱 어려웠다. 현역군인으로 있다가 잡혀 들어온 상엽이라는 놈이 맨 앞에서 관을 들고 오르고 있었는데, 시체는 무겁고 산 바닥은 미끌미끌하다 보니 상엽이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넘어지면서 하필이면 관이 상엽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넘어지는 것도 위험한데 무거운 관에 머리를 찧었으니 얼마나 아프고 화가 났겠는가. 부아가 치민 상엽이는 욕지거리를 하면서 관 밖으로 튀어 나온 참모장의 머리를 발로 힘껏 걷어찼다. “참모장 하면서 인민을 착취한 것도 모자라서 죽어서도 나를 죽이려고 들어!” 얼마나 열이 받았던지 세 번이나 시신의 머리를 뻥 소리가 날 정도로 걷어찼다. 사실 사람이 죽고, 죽은 사람을 걷어차는 그 상황이 비극적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웃겨서 삼십분을 서서 웃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죽이려고 들었다면서 웃고 또 웃었다. 시체가 헝클어지고 훼손됐지만 우리에게 그 시체는 중요치도 않은 하나의 물건이었을 뿐이다. 매장 터에서 시체를 대충 묻고서 상엽은 그래도 조금 미안했던지 주변에서 가장 좋은 돌멩이를 찾아 비석처럼 꽂아 주었다. 그리고는 ‘한 많은 세상 미련 두지 말고 이제 편히 가시오.’ 하면서 무게를 잡는데, 그게 또 너무 우스워서 한참을 웃었다. 죽음 앞에 숙연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도리인데,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감정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수용소에서는 바로 어제까지 나와 함께 일하고 식사하던 멀쩡한 사람도 다음날 아침에 보면 죽어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람이 죽으면 경비나 보위지도원에게 보고하고 시체를 묻는 것이 전부다. 시체를 묻어주고 오면 국수가 추가적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너도나도 시체 묻는 일을 하겠다고 난리였다. 죽음은 대수롭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상의 평범한 일부분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