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증언

[수기] 사진 한 장에 바뀐 운명 – 김광일 1부

중국 무역을 통해 외부세계를 접하다
내가 1999년 12월 35살의 나이에 요덕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중국을 왕래하면서 있었던 일이 들통 나서였다. 내가 중국을 왕래하면서 장사를 시작한 이유는 집안의 토대가 나쁜 사람은 북한 사회에서 직업을 갖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북한에서는 토대가 중요한데, 우리 집은 워낙 토대가 나쁜 축에 속했다. 지주, 자본가, 기독교집안과 6.25 당시 월남한 가족이 있는 월남자 집안은 토대를 나쁘다고 보는데, 우리 집은 외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고, 외삼촌들은 국군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을 했었던 집안이었기 때문에 특히 더 나쁜 축에 속했다. 나는 자라면서 우리 집이 토대가 나쁘다는 걸 몰랐다. 토대가 나빠서 불이익을 본 것은 대학입학 때부터였다. 각 학생들의 토대에 대해선 선생님들도 잘 모르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서나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추천하여 대학 시험도 치고 면접도 봤지만 불합격됐고, 왜 떨어졌는지 당시엔 그 이유를 몰랐다. 토대 때문에 입당을 할 수도 없었고, 그럴 듯한 사회생활을 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1983년부터 중국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때는 탈북한다는 생각보다는, 단지 중국 상인들과 거래를 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북한은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중국에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사실상 불법적으로 장사를 했다. 중국을 왕래하다 보니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미국 목사님과 만나서 사진을 찍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진을 북한에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고 다만 성경을 하나 가지고 북한으로 갔다. 성경을 지닌 것이 발각되면 잡혀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만든 책이라는 것이 신기했고 내용도 읽을 만 했다. 단지 선하고 바르게 살라는 내용인데, 왜 북한에서는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지 의문점이 들었었다.

그 때 라디오도 몰래 가져와서 이불 밑에서 들었다. 나는 라디오를 통해 한국 방송을 들을 수 있었는데, 대북방송에서 틀어주는 라디오 드라마나 한국소식을 듣곤 했다. 당시에 나는 액션영화 비디오도 북한으로 들고 들어갔다. 후에 내가 반입한 비디오를 보위부 사람이 보다 들켜서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북한에선 부부간에도 서로를 감시하는데, 그 사람이 집에서 비디오를 보는 걸 부인이 보고 고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토대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진 않고 좌천 정도로 끝났다. 토대가 좋은 사람이 정치범이 되면 주변 사람들까지 한 번에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눈감아주고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토대가 나빴기 때문에 후에 보위부 조사를 받으면서 이 사건으로 더욱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미국 선교사와 찍은 사진이 발각되다
내가 정치범이 된 건 성경이나 한국방송, 한국비디오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교회와 접촉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보위부에 넘어간 것 때문이었다. 이전에, 미국에 있는 외할머니가 편지를 보내 기독교 신앙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처음엔 보위부에서 그 편지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외국에서 오는 편지는 평양에서 미리 검열을 하고 전달하기 때문에, 당국에서 통과시켜준 편지를 왜 문제 삼느냐고 항의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건 중국에서 목사와 찍은 사진이었다. 북한 국적을 가지고 중국에 사는 사람들이 중국에서 북한사람 동향을 파악해 보위부에 고발하는 일을 하곤 하는데, 그 사람들이 내가 목사와 찍은 사진을 보위부에 넘기는 바람에 내가 교회와 접촉했다는 것이 들켜 버렸다. 그래서 나는 99년 4월에 체포돼 보위부 구류장에 수감되었다.

고통스러웠던 8개월간의 구류장 심문
8개월의 구류장 생활은 참으로 괴로운 것이었다. 주로 내가 한국 사람과 접촉하면서 어떤 간첩행위를 저질렀느냐에 관한 심문이 이어졌다. 그 당시 북한에선 중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을 다 간첩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북한 사람들에게 임무를 줘서 북한의 정보를 빼오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런 임무를 받았는지에 대한 것이 심문의 주요 내용이었다. 보위부 사람들도 나를 간첩으로 몰아야 실적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취조했다.

구류장은 좁은 방이다. 햇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을 뿐, 외부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구류장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다리 위에 올려놓은 채 몇 시간이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아침 5시에 기상해서 밥 먹는 시간 15분, 운동하는 시간 15분 정도를 빼면 하루 종일 똑같은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불이나 장판도 없는 널빤지 바닥이기 때문에, 단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석 달 정도 지나고 나니 하루 종일 앉아있는 것도 익숙해졌다. 식사도 옥수수가루 세 숟가락과 소금국물에 시래기 조금 넣은 것 정도만 나와서 허기를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바깥에 나갈 수 있었다면 풀이라도 뜯어 먹었을 텐데 방에만 가두어놓아 그것조차 어려웠다.

심한 고문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심하게 때리는 건 물론이고 줄 하나로 목과 손을 묶어서 풀어주지 않았는데, 그 자세로 오래 있다 보면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손이 새까맣게 변한다. 그 상태에서 겨드랑이 사이에 맥주병을 끼우기라도 하면,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통증이 심하고 몸이 부어올라서 반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 있다가 행여나 졸기라도 하면 찬 물을 몸 전체에 부어버린다. 북한에서 4월이면 아직 눈이 오는 겨울인데도 창문을 다 열고 난방은 전혀 해주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도 굉장히 얇았다. 바닥에 물을 뿌리고 젖은 바닥에 눕도록 하기도 했다.

6개월 정도는 잘 버텼다. 그러나 우리 집안의 토대가 월남했다 정도가 아니라, 외삼촌이 국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에 선처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결국 죄를 지었다고 허위자백을 한 후 손도장을 찍었다. 그 곳엔 재판도 없었다. 있지도 않은 죄를 시인하고 12월 5일, 나는 요덕으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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