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증언

[수기] 일을 너무 잘해서 잡혀가다 – 장영걸 4부

사람, 내가 요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수용소 생활은 일반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수용소 내에서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게 낫다. 수감자들 중에도 보위부원들의 사주를 받은 끄나풀이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보위부원들에게 보고가 들어갈 수 있다. 보위부원들은 작업반을 찾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집기를 마구 집어 던지면서 혼을 내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잘못했다, 한 수 가르쳐 달라.’면서 보위부원들의 비위를 맞추곤 했는데, 그 덕에 소대원들이 수월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힘든 수용소 안에서 우리끼리라도 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조금이라도 먹을 것을 얻게 되면 혼자 먹지 않고 꼭 작업반으로 가지고 와서 다른 소대원들과 나눠 먹고는 했다. 나의 마음이 통했는지 소대원들 역시 나를 잘 따라 주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개울에 갔다가 도롱뇽이나 귀한 물고기라도 잡으면 무조건 소대장인 나에게 갖다 주었다. 때로는 보위부원들이 소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살아있는 물고기를 먹으라고 할 때도 있었는데, 그럼 나는 소대원들의 사기를 생각해서 꿀꺽 삼키곤 했다. 그런 소소한 정이 우리에게 살아갈 의지를 불어넣어주었다.

당시에 혁명화구역 내에서 공무동력소대 신세를 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우리가 수용소에서 사용하는 모든 작업기구와 물품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병원이나 발전소, 농업반 때로는 경비병들에게서도 도움을 받곤 했다. 대숙리 내에 있는 발전소는, 대숙리 꼭대기에 위치한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저수지부터 발전소까지 연결된 수로가 꽁꽁 얼기 때문에 겨울이면 수로의 얼음을 깨는 일도 꽤 큰일이었다. 나는 항상 다른 소대보다 먼저 얼음 깨는 작업을 완수하고, 소대원들을 이끌고 발전소로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먹을 것을 얻어먹곤 했다. 통행이나 왕래가 철저히 통제되는 수용소 내에서 허락도 없이 발전소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된 사항이다. 그렇지만, 우리 소대는 발전소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전소 사람들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여러 소대가 공동으로 작업할 일이 생기면 보위부원들은 꼭 소대마다 몇 명씩 뽑아서 경쟁을 시켰다. 가장 먼저 작업을 완수하는 팀에는 강냉이를 부상으로 주곤 했는데, 이런 시합이 있는 날에는 내가 직접 힘 잘 쓰는 소대원 몇 명을 데리고 나갔다. 우리 소대는 거의 항상 1등을 했다. 부상으로 받은 강냉이는 절대 우리끼리 먹지 않고 꼭 작업반에 가지고 와서 모든 소대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모두 함께 고생하는 처지에 누구는 먹고 누구는 먹지 않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같이 끝까지 버텨서 이곳을 살아서 나가자는 의지를 함께 다지곤 했다.

모순덩어리 북한의 축소판,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 있던 정양소(요양소)는 몸이 약하고 병이 있는 사람들이 한동안 쉬는 곳이다. 노동법에 정양소를 설치하고 운영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곳이지만, 실제로 수감자들이 정양소에서 요양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당시에 정양소는 보위부원들이 와서 쉬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성수감자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일을 했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보위부원들의 목욕물을 받아주고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일이었다. 수감자들의 복지를 위해 존재해야 할 정양소는 사실상 보위부원들을 위한 유곽이었던 셈이다. 한국에서는 강력범의 인권도 존중한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인권이란 개념도 없을 뿐 아니라, 특히 죄인에게는 복지나 권리란 게 있을 수 없다. 사실 이는 수용소뿐 아니라 북한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심국에서 요덕으로 가라는 판결을 받았을 때도, 나는 내가 가는 곳이 수용소인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있던 지역이 요덕군 대숙리라는 것은 후에 당 이동증에 기입된 것을 보고야 알았을 뿐 아니라 그 곳이 15호 수용소라는 것은 한국에 온 뒤에야 알았다. 당 이동증을 제외한 다른 증명서들에는 2915부대로 표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 이동증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요덕에 있는 군부대에서 노동을 하다가 온 줄로만 알았다. 북한은 매우 폐쇄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정보가 제한적이다. 그런 곳이 있다는 소문은 있어도 관계자가 아닌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15호 수용소 혁명화구역에 수감되는 사람들은 기밀유지 서약을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다. 만약 수용소 내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한다면 다시 수용소에 수감되게 된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북한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축소, 극대화 된 곳이 바로 수용소이다.

요덕수용소의 혁명화구역에는 고위 간부 및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수감된다. 해군사령관을 역임한 방철갑도 1980년대에 수감됐었고, 락원군 책임비서, 정찰국장 등으로 있다가 끌려와 수감된 사람들도 있었다. 북한의 예술영화인 ‘민족과 운명’ 제작에 관여했던 사람도 혁명화에서 몇 년을 지내고 나갔다. 그는 김정일과도 알고 지내는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시기한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아서 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나오기 전에 들어온 가족세대의 가장은 김일성의 가계로 외교관을 하던 사람이었다. 발전소에 일하던 사람들은 국가과학위원회나 영변 핵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수감된, 하나같이 수재인 사람들뿐이었다.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쳐 충성하는 데 개인의 모든 재능을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돌아오는 것은 가혹한 요덕수용소의 혁명화 노동교화인 나라, 그 곳이 바로 북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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