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증언

[수기] 일을 너무 잘해서 잡혀가다 – 장영걸 2부

요덕으로 가는 길

예심국에서 판결을 받은 뒤 나는 곧바로 국가안전보위부 7국으로 옮겨졌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는 나 말고 다른 이들도 함께 화물차에 타서 요덕으로 옮겨졌다. 물론 당시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화물차의 사방은 다 막혀있고, 조수석 문 옆으로 조그만 쪽문을 만들어 죄수들을 화물칸에 싣게 되어있었다. 차 문은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있고 창문이 없어서 바깥풍경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에 화물차 안에는 나를 포함하여 11명이 타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모두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가던 길에 소변을 볼 수 있도록 두 번을 내리도록 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니 양덕고개였다. 양덕고개는 평양에서 요덕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인데, 양덕고개 국도는 동해안으로 통하는 옛 도로이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가 동해안 쪽으로 가는 줄만 알았다. 우리그렇게 한참 동안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차가 멈췄다. 우리를 호송하던 보위원이 바깥의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상품 실어왔소.”

우리는 물건취급을 받고 있었다. 우리가 멈춰선 곳은 요덕수용소 정문이었다. 차가 그 곳에서 꽤 오랫동안 정차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도 우리에 관한 서류를 넘겨주고 확인하는 작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후에도 대숙리 혁명화구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4번의 초소를 거쳤다. 정문을 지나 5번째 초소를 거친 후에야 밖에서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우리는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 대숙리에 도착한 것이다.



요덕수용소에서의 생활
혁명화구역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관리위원회에 가서 등록하고 서류를 넘겨주는 일이었다. 북한은 통제된 사회이기 때문에 거주지를 떠나면 관련된 모든 증명서를 새로운 정착지에 가서 등록해야 한다. 그러나 수용소 관리위원회에서 하는 등록 작업은 단순한 등록이 아닌, 사실상 수감자의 모든 서류를 빼앗는 것과 같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노동당증이 취소되고, 여자들의 경우에는 여맹증도 취소되며, 사로청원증, 식량정지증명서 등 북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서류를 빼앗는다. 등록을 마친 후 우리는 외래자반(신입자반)으로 옮겨졌다. 외래자반에는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혁명화구역 수감자들은 외래자반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수용소 생활에 대해 교육을 받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을 한다. 한 달이 지나면 중대나 독립소대에 본격적으로 배치된다.

당시 혁명화구역에는, 가족세대는 없었고 모두 독신자(1인수감자)뿐이었다. 오래있었던 수감자들의 말에 의하면, 1997년 이전에는 1970년대, 1980년대에 수감됐던 가족세대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내가 갔을 당시에는 기존에 있던 가족세대들은 어디에 갔는지 볼 수 없었다. 내가 해제되기 한 달 전쯤인 1998년에 두 가족세대가 들어왔는데, 그들은 중대에 소속되지 않고 가족끼리 생활하면서 일을 했다.


수용소에서의 일상은 매우 규칙적이었으며 24시간 감시당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식사한 후에 각자의 일터로 나가는데, 통제를 위해 점심은 무조건 숙소에 딸려있는 식당으로 돌아와서 먹도록 되어 있었다. 보위부원들이 불시에 순찰을 했기 때문에, 일을 할 때 한시도 쉴 수가 없었다. 밤에 잘 때는 불을 켜고 잤으며, 경비들이 15분마다 한 번씩 숙소를 돌면서 빈자리가 있는지 항상 확인했다. 화장실 바로 앞에 경비실이 있었기 때문에, 자다가 화장실을 가는 인원도 자동적으로 체크가 되었다.

식사는 강냉이밥과 시래깃국에 소금을 조금 넣은 것이 전부였다. 수용소에서 배급해 주는 것만 먹어서는 영양실조에 걸려 버틸 수가 없었고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야했기 때문에, 보위원의 눈을 피해 뱀이나 개구리, 물고기 등을 잡아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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