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일을 너무 잘해서 잡혀가다 – 장영걸 1부
1. 일을 너무 잘 했다는 죄
북한에서 나의 직업은 러시아 무역성 담당자였다. 무역성 담당자로서 나는 김정일 일가의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한 외화벌이를 했다. 당시 외화벌이 일 년 계획량은 백만 달러였다. 1994년까지 내가 근무했던 러시아 지구는 5년 이상 매년 백만 달러 넘게 외화를 벌어들이곤 했다. 매년 초과 달성을 했기 때문에 훈장도 여러 번 받는 등 외화벌이 사업자로서 나는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러시아 지구 담당자였기 때문에 북한으로의 출장이 잦았다. 그래서 1994년 갑작스런 출장 명령을 받았을 때도 아무런 의심 없이 북한으로 들어갔다.
1994년 출장 명령을 받고 북한으로 들어가 공항에 내리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출장 때마다 나를 태우러 나오는 임업성(혹은 임업대표부) 소속 차가 아닌 다른 차가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에 타니 나를 호위하던 국가안전보위부원이 운전수에게 말했다.
“117호 섬으로 갑시다.”
117호 섬은 해외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따로 수감하여 조사하는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초대소였지만,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내가 왜 초대소로 끌려가 그렇게 모진 조사과정을 거쳐야 했는지도 몰랐다. 후에 요덕수용소와 보위사령부 초대소를 모두 거치고 풀려난 후에야 나의 죄명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체포된 이유는 ‘외화를 너무 잘 벌어서’였다. 국가안전보위부 내부 방침 중 일 년에 백만 달러 이상을 버는 외화벌이 사업소를 잡아들여 조사를 한다는 방침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당국에서 내려주는 외화벌이 사업소의 1년 계획은 백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것이지만, 정작 북한 당국은 1년에 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획을 달성하는 외화벌이 사업소는 당연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고 전제를 하고, 잡아들여서 자신들이 이미 정해놓은 죄를 실토할 때까지 모진 고문과 조사를 하는 것이었다. 외화를 잘 벌어서 체포된 외화벌이 사업자들이 수백 명에 달한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국가가 정해준 계획량을 초과달성하였다는 이유로 국가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인재들을 체포하여 조사하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체제인가.
2. 5번의 초대소, 1번의 예심국 그리고 요덕수용소
나는 요덕수용소에 들어가기 전 3곳의 초대소와 1곳의 예심국을 거쳤고, 요덕수용소에서 나온 이후에도 보위사령부 초대소 2곳에서 1년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보통 구류장이나 초대소에서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초대소 117호 섬에서 처음 조사를 시작하고 1999년 11월 보위사령부 초대소에서 풀려나기까지 5년의 대부분을 초대소에서 지낸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조사를 받았던 117호 섬은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초대소가 있는 곳으로, 대동강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왕래가 철저히 통제된 곳으로,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작은 쪽배뿐이다. 초대소에 들어가니 국가안전보위부 3국 부국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사상 검토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성실하게 자기비판을 하라.”
그러면서 나를 독방에 가두고 종이를 주면서 무조건 쓰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모든 인생을 그들이 주는 종이에 하루 종일 썼지만, 그들이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구타를 하고 다시 쓰라고 했다. 수감자들이 자살을 할까 봐 식사를 할 때도 수저와 젓가락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수저를 준다고 하더라도 손잡이 부분을 자르고 스푼 부분만 주곤 했다. 식사도 강냉이죽과 소금물이 전부다. 감방은 독방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름이 아닌 죄수 번호로 호명되기 때문에 초대소 내에 누가 수감되어 있는지 서로 알 수 없는 구조였다.
117호 섬에서 8달을 지냈지만 그들이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자, 나를 다른 초대소로 옮겼다. 초대소를 옮길 때 그들이 나에게 한 말은 ‘성실하게 했으니 집으로 간다.’는 말이었다. 두 번째로 옮겨간 초대소는 평양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1년을 머물면서 조사를 받았지만 나에게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나를 다시 다른 초대소로 옮겼다. 이번에 옮겨간 곳은 당 생활부에서 운영하는 초대소였다. 이렇게 세 군데의 초대소를 전전하고서 1996년, 나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운영하는 예심국으로 옮겨졌다.
예심국은 사실상 죽으러 들어가는 곳이다. 예심국의 감방은 마치 새집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죄수들은 독방에 수감되는데, 이 독방들은 천장에 달려있어서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감방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각각의 감방 밑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모든 감방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누가 움직이는지, 소리를 내는지 감시한다. 앞과 옆은 막혀있는 벽이지만 뒤는 쇠창살로 되어 있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쇠창살 사이로 구타를 당하곤 했다. 비누는 커녕 씻을 수도 없었다. 죄수들에게서 얼마나 냄새가 났는지, 보위부원들도 우리를 조사할 때 멀찍이 떨어져서 조사를 하곤 했다.
예심국에서 이루어지는 예심은 3개월 단위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3개월을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최대로 버틴 사람도 8개월이었다고 하는데, 나는 예심국에서 1년을 버텼다. 예심 도중에 사망을 하면 사망자의 증언을 꾸며내고 정치범으로 모함하여 상부에 보고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살아서 나가야겠다는 다짐 하나로 끝까지 버텼다.
1년 동안 4번의 예심을 받았지만, 그들은 내가 과오를 저질렀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예심국장 방에서 혁명화 노동교화를 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크게 범죄를 한 거는 없지만, 결함도 많고 재외생활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법에 의한 판결이 아닌 예심국장과 몇몇 간부들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예심국 내에도 재판소가 있지만, 이 재판소는 이미 사형이 결정된 사람들에 대해 형식적으로 사형판결을 내리는 역할만 수행할 뿐 실제로 재판이 이루어지는 곳은 아니다. 사형도, 원칙적으로는 총살형이지만, 실제로는 목을 꺾어 죽이는 방식으로 형이 집행된다. 우리 같은 죄인에게는 총알도 아깝기 때문에 그냥 목을 꺾어서 죽인다고 했다.
1997년, 그렇게 나는 요덕수용소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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