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증언

김태진대표의 증언

김 태 진 (증언)

제 이름은 김태진, 56년생으로 북한에서 생활하던 중 1986년 중국으로탈북 하여 그곳에서 16개월 생활하다가 체포되어 1987년 중국 삼합-북한 회령 다리를 통해 북송되었다.

그때 나는 평등하지 않은 북한체제와 수많은 범죄와 사고가 하나도 공개되지 않고, 또 인민이 주인이라고 선전을 하지만 조그마한 자유도 없는 그 땅에서 살기 싫어 탈북 하였다.

나는 중국 용정시 로두구진 기독교회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때가 1987년 4월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하여서만 들었을 뿐 예수님과 기독론을 비롯한 지식이 모자랐다. 뿐만 아니라 성경도 읽어 보지 못하였다. 그때 나는 탄광에서 일 하였는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조금씩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그때 그들이 나의 짐을 꾸려서 내가 북송될 때 함께 보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심문 받을 때 성경에 대하여 물어 보기에 처음에는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자 심문관은 네가 혹 몰랐을 수 있겠지만 나의 상급이 이 대답을 이해 할 수 없다며, 바른대로 대라고 하였다.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어 성경을 구하여 읽으려고 하였다고 고백하였으며 그들은 나에게 어디서 하나님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느냐고 심히 추궁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당정책 훼방죄, 불법월경에 의한 ‘국가 반역죄’, 반 혁명분자라는 죄명을 씌워 요덕 수용소에 보냈다.
북송 된 나는 8개월 동안 심한 고문과 조사를 을 받고 1988년에 북한 함남 요덕에 위치한 15호 정치범 수용소에 재판도 없이 강제 수감되었다.

조사 과정:

움직이면 철창에 수갑 채워 매달고 권총소제대로 뼈 부위를 때려 고통을 준다.

추운 날씨에 잠을 안 재우고 나체 상태로 방치해둔다. 용변을 볼 때 방안의 온도가 너무 차서 변기통 주변이 얼어붙어 그 위에서 일을 보기에 고통스럽다.

위생관리가 안 되어 앉아 있으면 얼굴로 이가 기어 다닌다. 감방에서 나갈 때까지 세수를 한번도 할 수가 없다.

말을 하면 마주 세워 놓고 뺨 때리기를 시킨다. 조사 과정 너무 고통스러워 쇠못을 먹고 병원에 가서 배를 째려고 하였는데 못이 변으로 나와 실패했다.(수술의 아픔보다 감방 안의 고통이 더 크기에 그것을 잠시라도 모면하려고 선택하였다.)

수용소에서:

1988년 3월말에 북한 함경북도 요덕군에 있는 15호 정치범 수용소에 재판도 없이 수감되었다.

나는 심한 영양실조로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수용소측은 강제노동을 시켰다. 4월 우리는 산에서 부식토를 지게에 져 나르는 작업을 하였는데, 나는 힘이 없어 다른 사람보다 부식토를 적게 담았었다. 그것을 본 수용소 하수인이 발로 차서 나는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그를 욕하였다고 분주소(보위원들이 있는 곳)에 불려가서 내부지도원에게 참나무 장작으로 심하게 맞아 실신한 것을 수감자들이 방으로 들어갔다.

89년 8월이지만 한 밤은 추위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지게에 무거운 것을 지고 머리를 숙이고 가다가 경비병이 지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경비병은 저녁에 나를 불러내어 자기 동료 7-8명을 찾아 함께 나를 타격대상으로 삼고 마구 구타하였다. 그 후 그들은 나를 벌거벗기고 마당 한가운데 수갑을 채워 세워놓았다. 그때 나는 맞는 것보다 이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다시 느끼었다. 그때도 나는 하수인이 일하러 가자고 발로 깨우는 바람에 깨여났다.

수갑을 채울 때 발로 밟아 수갑을 조여 손이 금방 새까맣게 죽었다. 그리고 생석회 위에 앉혀 놓았는데 비가 내려 생석회가 피여(석회 덩어리가 물과 화합을 하면 석회가 끓으면서 가스가 방출되면서 온도가 100도 씨 이상 올라간다) 살이 익는데 경비병들은 그대로 앉혀 놓았다. 그때 엉덩이에 화상을 입어 1달 정도 바로 눕지도 못하고, 변을 볼 때도 살이 당겨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한동안 바지를 못 입었다. 상처에서 진물이 나와 상처에 붙으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경비병들의 방탄벽 공사에 동원 중이었다.

나는 90년 가을 옥수수 밭 경비를 서다가 불을 피우고 옥수수를 구워 먹다 보위원 양수철에게 들키었다. 그는 불붙는 장작으로 나의 다리를 마구 때리었는데 그때의 화상자리는 아직도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

수용소에서는 자신이 인간임을 잊어야 된다. 그래서 나는 개 먹이를 훔쳐 먹으려고 개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고 뱀과, 개구리, 쥐 등, 먹고 영양을 보충 할 수만 있으면 가리지 않고 먹었다. 왜냐면 꼭 살아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수용소 안에서는 일이 너무 고되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사람, 미친 것 위장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다고 삽날에 맞아 파상풍으로 골수가 썩어 팔을 잘린 사람, 말도 안 되는 할아버지의 죄로 가족이 들어와 2-30년씩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수용소 감방에서:

나는 그곳 수용소에서 감방에도 갔었다. 감방 용도는 수용소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보통 한달 동안 가두고, 그로 인하여 수용소 생활이 1년 연장되었다. 수용소는 평화롭게 표현한다면 하나의 마을이다. 나는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임신을 했다. 그녀는 강제로 애를 떨구고, 나는 감옥에 가게 되었다.

수용소 감방에서 너무 추워 다리를 세워 가슴에 안고 옹송그리고 앉으면 조금 견디기가 쉽다. 그래서 그렇게 앉아 있는데, 간수가 보고 그렇게 앉았다고 옷을 벗기고 구두발로 마구 차서 얼굴과 코피가 터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어지러웠다. 그 후 간수가 한방에 나를 집어 넣었는데 그 방에 벼룩이 너무 많아 고통스러웠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제발 벼룩이 없는 방으로 옮겨 달라고 애원하니 간수가 물통에 물을 담아와서 나에게 끼얹었다. 온몸이 얼어 드는 고통은 다른 고통을 훨씬 능가하였다.

지금도 나는 찬바람이 잠깐 나를 스치면 재채기를 하며 콧물이 나온다. 그러면 그때가 떠올라 정신적이 고통을 받는다.

92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지옥에서 살아나온 나는 97년 혜산을 거쳐 다시 탈북 하였다. 중국에서 항시적으로 따르는 신변의 위협이 있었지만 나는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경을 마음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나는 2001년 6월 몽골을 거쳐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한국에 입국하여 지금은 총신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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