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증언

15호 수용소 김영순씨 생활

김 영 순


나는 중국 심양(審陽)시 서탑에서 1937년 5월 26일에 태어나 북경을 거쳐 부모님들과 함께 북한으로 귀국했다. 부모님과 오빠 모두 남한 출신이었지만 오빠가 공산군인 탓에 북으로 가게 되었다.

북한의 예술인재 양성을 위한 평양 종합예술학교의 무용학부 졸업 후 조선인민군 협주단으로 배치되어 1955년 8월 말에 입대하였다. 1968년 제대 후 방직 일용성에 속한 외국인 상점에 취직하였다.

외국인 여행자 상점에서 근무하던 중 1970년 10월에 정치범 제15호 수용소에 가게 되었다. 보위부 초대소에서 2개월 취조를 받고 제 15호 관리소의 제 3작업반에서 5년 동안 일하였다. 1975년에 다시 용평리 제 7반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농사를 지었다.

용평리는 완전통제구역으로 지주, 치안대, 부농, 중농, 월남자, 목사, 선교사들이고 장본인과 1세대들은 다 처단되고 그의 처와 2세대들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는 결혼도 할 수 없고 배급도 없이 자급자족해서 살아야 한다. 용평리는 주로 수용소 내 다른 지역에서 멸시받고 도외시 받던 대상을 한곳으로 모와 놓은 곳이었다. 장본인은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자들을 말한다. 즉 연좌제에 의해 정치범의 가족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60% 이상이다. 장본인이 수용소 내에서 죽게 되면 당일로 즉시 장례식 없이 시체를 처리한다. 관도 없이 거적에 싸서 처리한다.


나는 재판도 판결도 없이 무턱대고 짐을 싸서 무작정 수용소로 끌려갔다. 배급받는 음식으로는 통 강냉이 조금과 들쥐들뿐이다. 어미 쥐의 배에 든 털 없는 새끼 쥐가 어린 아이들 식독에는 가장 좋은 약으로 알려져 있어 쥐도 귀한 형편이다.

나의 남편 이동명은 1936년 3월 6일생으로 조선백과사전 출판사에 근무하였다. 남편은 1970년 7월 4일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어 현재까지 죄명, 생사여부를 전혀 모른다. 부모님은 수용소에 들어온 지 6개월 만에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시고 2년 만에 어머니가 영양실조와 부종으로 돌아가셨다. 11살짜리 아들은 수용소 내의 학교에서 돌아오다 다리가 없는 강물을 건너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었다. 1988년에 당시 23살 먹은 아들은 중국국경에서 탈북하려다 5년형을 살다가 다시 탈출을 시도하다 총살당했다.

저는 뽕나무에서 떨어져 쇄골이 골절 되었으나 출근길에 치료도 못하고 그냥 나가 일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10리~15리 길을 뛰어서 출근해야했기 때문에 과로로 간이 5cm 정도 부었으나 진단도 약도 못 받고 그냥 살아야했다. 수용소에 들어가자 정신적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서 3년간 생리가 중단될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북한 여성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과거에는 총과 칼 앞에서 노동을 해야 했으나 현재는 사나운 감독원의 통제 하에서 노동해야하며 개개인의 모든 행동과 사항은 바로바로 상부에 통보된다. 그래서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는 15호 수용소 내에 있는 보위부 청사 내의 구치소로 끌려간다. 구치소로 들어가면 살아서 나온 자는 없다. 수치소로 끌려가는 방법도 현장에서 체포하거나, 사상투쟁회의 장소에서 끌고 가거나, 갑자기 집으로 찾아오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귀신 몰래 구금하고 행방불명으로 처리한다. 내가 있을 당시에는 수용소 내 수감자들의 30% 정도는 구치소로 들어가 사라졌다. 그 나머지는 병으로 죽게 되는데 공통적으로 비타민 D 결핍으로 “페라그라 병”같은 영양실조에로 죽는다.

농사일을 맡은 분조(8~9명으로 구성, 3~4가족이 포함)의 경우는 모판관리를 시키는데 모에 조금이라도 이상 현상이 생기면 반동적 간첩행위로 치부해서 구치소로 끌려간다. 이것 때문에 처리되는 사람도 엄청 많다. 수용소 수감자들 내부적으로도 보위원 감독원 앞잡이가 있기 때문에 최대로 각성해서 생활하지 않으면 걸리기가 일쑤이다. 사소한 불평도 다 반혁명분자 딱지가 붙는다.


매일총화(평가를 위한 모임), 주총화, 월총화, 분기총화, 상반기, 하반기 총화, 연말 총화 등을 항상한다. 하루종일 정해진 노동시간도 없이 일하다가 이런 총화를 위해 모이면 다 졸게 된다. 그러면 서로 때리게 하고 밖에서 뛰게 한다. 내가 있는 동안 2명이 탈출을 시도했고 이들은 공개총살 당했다.

만약에 배나온 사람이 수용소에 들어온다면 15일이면 배가 쏙 들어가고 얼굴색은 흑색으로 변하고 몸을 가누지 못한다. 일을 못하면 집단, 분조책임으로 해서 서로 때리고 물고 뜯게 만든다.

15호 수용소에는 정신병자수용소가 따로 있다. 수용소 입구 우측에 따로 있는데, 전국적으로 정신병자들 중에서 김부자에 대해서 말한 정신병자들은 다 17호 정신자수용소로 끌고 와서 결국은 다 죽인다. 이들은 거의 매일 죽어서 나간다.

수용소에 학교가 있으나 정식 교육을 하는 학교는 결코 아니다. 선생은 보위원들의 자식들이 하고 있으며 학생들은 단지 토끼 사육공에 불과하다. 그래서 학생들이 토끼풀 과제 하루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벌을 세우고 집에도 안 보낸다.

수용소에 입소한 사람들의 죄명을 보면, 김일성의 목에 혹이 있다고 해서, 김일성 김정일의 석고상을 깨어서, 김일성 초상을 훼손시켜서,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발라서, 김정일의 후처 성혜림과 그의 아들 김정남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남한방송을 청취한 죄로, 상점에 물건이 없다고 말해서 등의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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