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피해사례] 지하 감방 고문
(요덕 수용소 수감되었던 정광일씨의 북한 보위부의 지하감방 생활의 9개월간의 감방고문행위)
처음 체포된 것이 1999년 7월 회령에서였다. 친구의집에서 술을 마시고 잠깐 자고 있었는데 보위원들이 집에 들이닥쳐 알아볼게 있으니 잠시 같이 가자고 했다. 도망갔어야 했는데 큰 죄 지은 게 없으니 따라갔다가 회령시 보위부로 끌려갔다.
바로 지하 감방에 보내져 1주일간 감금되었다. 1주일 후부터 조사가 시작됐는데 보위부원 2명이 들어와서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조사관이 회령시 곡산공장 보위부장 지영수였는데, 9개월 동안이나 모질게 고문했다. 나에 대해서는 회령시 보위부가 아닌 상급기관인 함경북도 보위부에서 나와서 취급했다.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으로 있던 윤창주와 홍종환라는 사람이 기억난다. 이들은 김정일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충성심을 발휘하려고 일을 벌인다. 윤창주는 중국으로 탈출한 국군포로를 잡아서 납치해 북한으로 송환한 인물이기도 했다.
내가 끌려간 곳은 회령시 보위부 지하 감방이었다. 처음 들어가서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 몽둥이)로 몸을 마구 두들겨 맞았다. 내가 부인을 해서 2시간 동안 맞았는데 뒤통수를 한번 맞아서 뒤통수 부위가 깨졌다.
지금도 머리에는 세 군데에 상처가 있다. 각목으로 때려 여기 저기 피가 터지자 무릎을 굽히고 손을 뒤로 얹고 앉게 한 다음 발뒤꿈치로 허벅지를 내려찍었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치아가 몽땅 부러져서 4년간 이빨 없이 살아야했다. 북한에서 치료를 받지 못해 나중에 중국에 나와서 거의 5년 만에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보위부에서는 계속 맞고 조사받고, 맞고 조사받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잠 안 재우고 하는 가혹행위 중에 ‘비둘기 고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손을 뒤로 묶고 쇠 창살에 수갑을 채워놓는데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하루가 지나면 어깨 근육이 굳고 가슴뼈가 새가슴처럼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몸 전체가 굳어버린다.
보위부 지상에도 감옥이 있지만 그곳은 주로 잡혀온 탈북자들이 들어가는 곳이고, 간첩죄 혐의자나 정치범들은 지하 감방에 넣는다. 지하 감방에는 간수도 없었다.
가두어 두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라는 식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테니 죽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묶여 있으면 점점 감각이 없어져 온 몸이 마비되지만 그래도 똥오줌은 나온다.
하지만 화장실도 안 보내주니 똥 오줌도 그냥 바지에 질질 쌀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었던 지하 감방은 아무리 소리치고 비명을 질러도 위에서는 들리지도 않아 다른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2명이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서 조사관들에게 “배가 고프니까 뭐 좀 먹고 나면 사실대로 다 말하겠다” 고 했더니 먹을 것을 많이 가져다주었다. 다 먹고 난 다음에는 간첩행위를 부인해버렸더니 더 심하게 맞았다. 내가 체포되었을 때 75kg이었는데 조사를 받으면서 38kg으로 몸무게가 줄었다.
나는 절대로 간첩 질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이 맞다보니 그냥 인정해버렸다. 보위 원들은 “너는 보위부에서 절대 살아서 못나간다. 인정하지 않으면 죽어서 나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어서 “이렇게 살다가 이제 죽는가보다”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나중에는 내가 약해지니까 죽을까봐 때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목숨이라도 부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죄를 모두 인정해 버렸다.
마지막에 보위부 검사가와서 조사를 했다. 검사 에게 너무 맞다보니 없는 죄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억울하다고 했더니 나를 조사했던 조사관이 달려와서 “너 똑바로 대답 안 해?”하면서 또 다시 마구 때렸다. 국가보위부에서 내려온 검사의 역할은 죄를 확인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사가 보위부로 내려오면 보위부 조사관들이 검사들에게 허위조사를 한 적이 없으니 잘 봐달라고 부탁을 미리 해두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가 않는다.
식사는 완전 쓰레기를 갖다 주었는데, 보위부원들이 먹다가 남는 퇴식 물(잔반)을 줬다. 지하 감방 에는 간수도 없어서 제대로 주지 않고 이틀에 한 번 줄 때도 있었다. 한번은 열이 심하게 나서 형편없었는데 봐주지도 않았다. 방 안에는 이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옷도 한 번 갈아입지 못했다. 내가 7월에 끌려갔는데 한겨울에도 잡혔을 때 입고 있던 여름 남방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때 얼마나 억울했는지 지금도 치가 떨린다. 회령시 보위부 지하 감방에서 죄를 다 인정한 다음에는 재판이나 다른 어떤 절차도 없었다.
지하 감방에서 풀려나 일반감옥으로 올라오니 이불 짐 같은 보따리만 하나 있었다. 가만 보니 내가 집에서 덮던 이불이었다. 우리 집에 가서 이불을 갖고 온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히 마지막엔 도보위부에 있었던 친구의 도움을 얼어 죽진 않고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2000년 4월 요덕수용소로 보내져 또 다시 3년 동안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엔케이워치 조직팀장 정광일